2009-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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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시겠어요? Would you like to drink?
Deuleobosigesseoyo? Would you like to drink?



+냅킨에 쓰여진 이야기 Writing a letter on the napkin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처음으로 우리가 필리핀 시장에 갔을 때 느꼈던 생경함과 낯설음은 지금도 여전히 마음 한 켠에 놓여있다. 북적거리는 외국 사람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길은 하나였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순간이었다. 그 날 우리 눈에 들어왔던 것이 큰 통에 담겨진 묽은 우유 빛의 음료수였는데, 그게 바로 코코넛 주스였다. 여름의 끝자락이라 후덥지근한 날씨였고, 시장의 열기도 그랬고, 어색한 시간들에 갈증도 났었나 보다. 우리가 가장 먼저 대학로 필리핀 거리 시장에서 사서 먹은 것이 바로 코코넛 주스였는데, 그 맛이 특이했던 게, 도무지 한국 내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 같은 물 맛과 우유 맛과 밍밍한 단맛의 조화였다. 그 맛이 필리핀 시장이다, 라고 규정짓는 게 아니라, 필리핀 시장은 그런 맛으로 우리에게 첫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레시피 받아쓰기

“암팔라야 마따미.” “이건 뭐에요?” “몰라요.” “얼마에요?” “잠깐만요.” “괜찮아요.” 일요일 한 낯, 생겼다 사라지기를 7일마다 반복하는 이 낯설고 생경한 시장에서는 그와 같은 짧은 문장들 말고도 무수히 희미한 목소리들이 귓가를 울린다. 우리는 그 시장을 찾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서 누군가와 누군가, 관계들의 항 속에서 떠도는 말들을 잡기 위해 한 발 다가서 물음을 던진다. 그 혼란스럽고 망설이는 가운데 가장 손쉽고 명확히 들을 수 있는 말 들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 가장 손쉽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은 시장 안에서 냄비 안에서 부글거리는 기름과 같이 뒤섞이는 하얀 알들, 라이스 페이퍼에 둘둘 말린 바나나 혹은 야채들, 커리 혹은 동남아식 걸쭉한 소스 안에서 뜨뜻하게 익혀져 뒹굴고 있는 고기 덩어리들, 이렇게 가장 확실하고 분명해보이는, 아니 오히려 원색적인 색채를 발산하고 있다고 해야 맞을 음식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곱게 잘 싸여진 라이스 페이퍼 튀김 속에 무슨 야채들이 들어있는지 라도 알고자 한다면 우선 질문해야한다. “무엇으로 만든거에요?” 흔히들 이런 질문에 대한 비결을 레시피(조리법)이라고 한다.

필리핀 시장 거리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지는 두 가지 음료수, 코코넛 주스와 멜론 주스는 그 시장의 우발적이고 즉흥적이지만 매우 구조화되고 습관화 되어있는 경로를 수행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 필리핀 시장에 온 누군가가 생물학적인 목이 마름-여기에는 자신이 을 너무 많이 했다거나 날이 무덥다거나 하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을 느끼거나 이국 혹은 낯섬에 대한 궁금증에 시달린다면 아마도 한 번쯤 제법 큰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겨져 얼음을 동동 띄운 이 하얀 우유 혹은 투명한 연두빛의 액체에 굉장한 매혹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혹은 그녀가 이 음료수가 무엇인지 섣불리 진단할 수 없는, 즉 시장에 관한 사전지식이 풍부하지 않다면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건 어떻게 만든거에요?” 그 반대항에 위치한 답변자, 시장의 상인은 우리가 시장에서 석 달여 경험했듯이 고객이 자신의 궁금증을 발설하기 전에 먼저 말을 건낼지도 모른다. “이거 코코넛 주스. 우유랑. 맛있어요.”

레시피를 받아쓰거나 적어주는 것은 이렇게 수용하는 방향과 가역-발언이라는 힘을 가하는-방향을 전환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질문을 던졌던 사람은 음료수 제조에 관한 지식이나 배움을 얻게 될 수 있고, 동시에 고객의 필요에 환대로 맞이하거나 봉사자의 역할을 했던 상인은 누군가에게 작은 가르침을 내려 줄 수 도 있게 된다. 시장에서 매 순간 다른 사람을 맞이하고 보내는 생동하는 자는 관찰자와 이러한 지배적 위치에서의 비껴선 역할 바꾸기로 대화를 튼다. 받아쓰는 대화는 숙명적 상대방의 역할이라는 반복적 순환에서 이탈된 경로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시장의 일상적인 주고 받음은 마치 신들린 듯한 몸짓처럼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유롭게 시장이라는 플로어 위에서 춤을 추며 융합하고 분화하며 생성한다. 그리고 질문과 답변에서 위와 아래, 좌우, 여러 미각들로 오가는 두 항의 목소리를 있게 하는 그 알 수 없는 신비하고 에로틱한 영향력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필체에서 더욱 강렬하게 묻어난다. 개인의 환대에서 비롯된 단순한 행위가 뒤집는 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이제 우리는 날이 쨍쨍한 일요일 오후 목을 축였던 음료수 레시피를 시장의 익명적이며 발현적인 한 개인의 필체로 받아 적고 그것을 일요일과 시장과 필리핀이라는 대상들과는 영 엉뚱한 관계에 있는 미술관에 찾아온 관객에게 음료수라는 단순한 연결점을 통해 제시한다.

+냅킨 플라이어

우리가 이번 프로젝트의 플라이어와 관련해서 기획자 권진씨와 짧은 미팅을 가졌던 곳은 아르코 미술관 1층의 카페였다. 그림자가 가장 섬세하게 만들어지는 햇빛과 선선한 바람에 우리 모두는 야외에 앉았는데, 시간이 너무나 여유롭고 조용하게 흐르는 것 같아 그 분위기에 잠시 취했었는지도 모르겠다. ps.press가 어떤 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지에 관한 의견들이 분분할 즈음, 필리핀 시장 가이드 라던지, 리플렛 이라던지, 신문, 전단지 등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부유하는 혹은 움직이는 관계성에 대해 노래하듯이 대화하였다. 그리고 권진씨는 마치 플라이어 같은 느낌이라면 좋겠다고 의견을 던졌는데,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나자 우리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우리 작업을 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얀 탁자 위에 놓여진 하얀 냅킨이 눈에 들어왔다.

미술관에서 오프닝 리셉션이나, 케이터링, 혹은 학술 행사, 심포지움 같은 것들이 열릴 때면 약간의 음료와 다과가 준비되는데 그 시간의 인상은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깨끗하고 간편한 접시와 가볍고 투명한 플라스틱 컵과 그 컵을 감싸고 있는 냅킨으로 남겨져 있었던 것 같다. 그 공간 속의 사람들은 모두 눈인사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한 손에는 준비된 음료가 담긴 컵을 냅킨과 함께 들고 있었다. 경험과 기억과 장면의 인상들은 갑자기 후루룩거리며 머리 뒤 쪽을 돌아가는데, 냅킨을 플라이어로 날리면 아주 좋을 것 같았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고, 부담이 없고, 중요하지 않지만, 꼭 필요하기도 한 냅킨을 통해서 필리핀 시장의 이야기를 미술관이라는 공간 속에 아주 살짝 넣어본다면, 그래서 냅킨처럼 작고 소소하지만 쓸모가 있는 관심으로 다가간다면 말이다. 어느 새 내 손에 쥐어진 한 장의 냅킨처럼 사회의 다양한 시각과 삶의 모습들은 우리 스스로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서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와 함께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미술관에서 벌어진 일들

제도화된 미술관은 손님-관객-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빈번하게 충족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욕구를 향상시키려 여러 방향으로 자신의 활동을 모색한다. 때론 관례적이기도, 반대로 생산적이기도 한 미술관의 행사들에서 관객의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냅킨 은 깔끔한 미술관의 이미지를 생산하며 흘러내린 음료수나 먼지 부스러기를 닦아내는 휴지 역할을 한다.

우리는 몇 주전에 있었던 미술관의 심포지움과 그 보다 앞서 있었던 소규모의 영화 스크리닝에 필리핀 음료수-두 종류 가운데 코코넛 주스-레시피가 인쇄된 냅킨을 관련 텍스트와 함께 선보였다. 관객들은 하얀 냅킨의 얼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검은 글씨 때문인지 가져가길 주저하며 호기심 반 의아함 반으로 들여다 보기만 하기도 하고, 예기치 않게 쏟아져버린 음료수를 닦아 내기 위해 사태 마무리 응급 처치용으로 급박하게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냅킨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읽어보고 한 장 집어가는 사람도 있었으며, 반대로 건조한 눈길 한 번만 주거나 아예 그 조차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외에도 우리가 관찰하고 적어내지 못한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을 것이다.

냅킨이 미술관의 행사들에서 얼마나 성공적인 수행을 거두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한 작업자 듀엣의 자기성찰에 머무르지 않는다. 현재 많은 미술작업들이 세계와 우리의 삶의 매 순간 질문을 던지고 전환을 유도하는가. 이는 그 행위들이 얼마나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에 관해 고민하는 것과 맞물린다. 성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작업과 그 과정, 즉 수행성을 되씹는 것이야 말로 주어 혹은 목적어의 정체 찾기, 혹은 밝히기에 머무르지 않고 술어의 개별성을 찾는 것에 우선하는 과제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미련한 방식으로 가능한 미술관의 행사들에 냅킨을 등장시키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또한 관객의 한 명으로 참석한다. 이 결과들은 아직 두 세 번의 예상 가능한 일화들을 만들어냈을 뿐이지만 제작한 냅킨이 한 장도 남김없이 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무엇을 닦아내고 더럽혀져 구겨져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그 시점을 고대한다. 작은 희망, 혹은 관계항의 작용에 관한 순진한 믿음을 동반하는 행위들의 지속을 제도와 무기력에 얼어붙은 작업자의 목표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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